보고 싶다. -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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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첫발을 내디디며….
세상이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어깨에 멘 가방의 무게가 평소보다 둔탁한 감을 주고 있었고, 발걸음마저도 빨라지고 있었다. 부산하고 복잡했던 일과를 뒤로하고, 비행기에 올랐을 때는 조금 서두르기도 했고,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들떴던 것도 사실이었다.
비행기로 출장을 여러 번 갔다 왔음에도 이렇게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있기는 처음인 고로, 나 스스로 조금은 긴장되고도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보딩 패스를 검사하는 게이트에 줄을 서기도 전에, 나는 마지막으로 집사람에게 공중전화를 걸었다.
“자기야, 나 이제 비행기 탈 거야. 운전 중이지?”
“응, 그러면 잘 다녀와…. 건강 조심하고…. 그리고, 행여 백마 타보려고 꿈쩍댔다간 알지? 호텔에 도착하면 전화해.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에이즈 무서워서 어디 백마의 백자나 들이댈 수 있겠나….
“그건 그렇고, 당신도, 알지? 나 없는 동안….”
“어이구, 고작 먼 길 떠나는 마당에 그런 얘기나 하고…. 아무튼 알아줘야 해. 자기나 몸조심해. 나야 애들 복작대는데, 무슨 일이나 있으려고? 당신 없으니, 저녁 찬거리 눈 부라리게 신경 쓸 것도 없고, 와이셔츠 줄줄이 다릴 필요도 없으니 편해서 좋구먼…. 그리고, 참, 빨랫거리는 어쩔 거야?”
“어쩌긴…. 몽땅 들고 다시 돌아오는 거지.”
“그러지 말고, 그 뭐냐, 빨래방 같은 거라도 있으면 가서 되는대로 빨아서 입어. 괜스레 맞지도 않는 옷 나부랭이, 돈 버려 가면서까지 사서 입고 다니지 말고,…. 알았지? ”
“알았어. 고생해. 나 그러면 간다…. 사랑해 여보….”
“나도….”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은 매정하리만큼 아끼는 아내. 그래도 “나도….”라는 한 단어에 녹아 있는 아내의 그 사랑을 나는 깊이로 짐작한다.
그 운율과 톤에서 전해져 오는 아스라하고 푸근한 든든함의 그것은 굳이 사랑이라는 흔한 어구로 표현될 수 없는 운치였으니까.
말소리가 잠겨 버릴 정도의 굉음이 비행기의 엔진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서서히 활주로를 타며 진로를 잡아가는 비행기 좌석에서 나는 후진을 할 수 없다는 비행기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엔진의 폭음이 고조되면서 갑자기 청룡 열차를 타고 상승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누르면서 비행기는 이륙을 위해 몸을 떨었다.
이윽고, 속이 울렁이는 느낌과 함께 공항의 활주로가 어둠 속에서 점점이 멀어지면서 나는 애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찔한 감을 잊으려는 듯 손에 들고 있는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매일 대하는 신문의 기사들, 그저 그렇고 뻔한 얘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습관적으로 펼쳐 드는 그 버릇을 버리지는 못한다.
눈으로 훑고는 있어도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복잡하기만 했고, 이내 끝마치지 못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안전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실내등의 사인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기장의 인사말과 비행 브리핑이 끝나는 것과 함께 안전벨트를 풀라는 신호등이 켜졌다. 사람들은 완전히 어두워진 창밖의 풍경으로 인해 곧바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옆 좌석의 양해를 구해가며 가방에 넣어 놓았던 전자수첩과 서류철을 꺼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있게 될 세미나에 대한 사전 숙지를 위함이었다.
전자수첩을 뒤져가며 그동안 출장을 위해서 정리해 두었던 각종 메모를 꺼내보면서 나 나름의 기록을 이어가느라, 나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태평양 바다 위에서 날이 밝을 것이고, 한낮쯤에 도착하게 될 케네디 공항….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꺼내 놓았던 서류와 자료들, 그리고, 전자수첩을 넣기 전에 나는 도착에서 이어질 일정에 대한 계획표를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사흘간 뉴욕에 있다가 캐나다 토론토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입국하게 되는 머나먼 여정…. 한곳에 머물기도 바쁘게 다음의 이동 도시로 향하는 비행기 예약확인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었기에 나는 기록된 일정 안에 그 부분을 끼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전자수첩을 덮기 전에 도착할 곳에서 연락해 볼 친구들에 대한 전화번호와 주소를 다시 훑어보았고….
“글쎄, 일정이 빡빡해서 연락할 수 있을지 몰라…. 다들 사느라 바쁠 텐데….”
불편한 기내 자리였지만 나는 이게 밤이겠거니 하면서 눈을 감았다.
벌써 옆자리의 여자는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몸을 덮고 있는 담요를 한껏 목 위로 치켜대고 있었다. 서울로 치면 한밤중의 시간,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있으므로 해서 몸은 나름의 생체리듬을 잃고 있는지 잠이 들만하면 화장실로 나를 불러 세웠다.
얼굴은 퉁퉁 부어가고, 발은 저리는 비행기 여행의 괴로움…. 깜빡 졸다 보니, 창으로 햇살이 비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 길게만 느껴지던 시간이 벌써 착륙을 앞두고 있었다. 시간을 현지에 맞추어 고치면서 썸머 타임까지 감안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그 단순한 시간 계산도 버벅대고 있었다.
선회하던 비행기가 안전하게 활주로를 밟으면서 좌석의 중간, 중간에 있던 외국인이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당연히 무사히 착륙해야 하는데, 박수는 뭔 박수냐는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다보았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평과 비평에 익숙해 있고, 남에게로 향하는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그런 기성세대, 누가 쫓아 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행기에 들어올 때나 나갈 때나 언제나 밀치고 줄의 맨 앞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 그게 나였다, 아니 우리들이라고 해야 옳았다.
검색대에 서서 여권에 도장을 받으면서 나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치를 달린다는 미국의 첫 관문에서부터 다른 인종에 대한 묘한 배척감을 느꼈다. 그들 나름대로 교묘하게 위장된 인종차별의 흥건한 냄새,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자신들은 그 흔하디흔한 외국 여행 한번 못해 보고 살아가건만, 너희 것들은 무슨 영광으로 이렇게 비행기씩이나 떡 하니 타고 남의 나라 대문을 두드리냐는 투의 질문.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평생에 다시 볼 인간들도 아니고, 내가 그들에게 반감을 품는다고 뼛속 깊이 습성화되어 겉으로 트집 잡기 어려운 그들만의 인종차별에 대한 표현상의 노하우를 걸고넘어지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넓고 큰 규모에 놀라고, 넘치는 사람으로 인해 나는 정신이 쏙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사람들을 향해서 들려있는 수많은 피켓을 무심코 하나하나 살피면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피식, 웃음 짓고 말았다.
머나먼 곳에서 동명이인 일지라도 내 이름이 적혀 있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나를 아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이미 예약된 호텔로 가기 위해 가판대에서, 물론 관광할 때도 필요할 거라는 생각에 뉴욕의 시내 지도를 하나 샀다.
가방을 들고 천천히 공항 밖으로 나갔다. 품속에서 열 시간이 넘도록 잠자고 있던 담배와 라이터, 나는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른 케네디 공항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드디어 미국에 온 것이었다.
희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치미는 어지럼증은 마치 담배를 처음 배웠을 때와 같은 그 울렁거림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가슴 속 저 끝까지 칼끝처럼 파고드는 연기는 그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매력일 수 있었다.
입안에 고이는 침과 함께, 밤사이 텁텁했던 입안이 담배의 찌든 냄새까지 겹쳐 이루 말할 수 없는 역겨움이 밀려들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야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시 가방을 들고, 택시라도 타고 호텔에서 팁이라도 주려면 얼마간 환전을 해야 했기에 공항 안으로 다시 들어갔지만, 이미 나와 함께 내린 승객들은 마중 나온 사람들과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으며, 이제는 다른 곳에서 도착했을 법한 모양새의 승객들이 출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어?”
나는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나와 마주친 그녀도 나를 보고 그 자리에 못 박히듯이 멈추어 선 것은 물론이었고….
그녀였다.